“우리는 두 개의 집을 갖고 있다. 한 집은 불타고 있고, 다른 한 집은 건설 중이다.”
불타는 두 개의 집
가디언 칼럼니스트인 제프 자비스는 현재 레거시 미디어가 처한 현실을 이렇게 정리했다. 그렇다. 지금 레거시 미디어는 일종의 주거난민 신세다. 원래 살던 집 한쪽 구석에선 연기가 나고 있고, 새로 짓는 집은 과연 준공이 될지 (된다면 언제 될지) 몰라 입주를 주저하고 있다. 새로 짓는 집은 당연하게도 뉴미디어다.
18년차 방송기자지만 방송사 저녁 메인 뉴스 본방을 TV로 시청한 게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다. 종이 신문을 놓은 지는 더 오래됐다. 기자가 TV와 신문을 안 본다니... 하지만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TV와 신문을 안 봐도 뉴스 갈증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시각 가장 핫한 뉴스는 포털 상단에 실시간으로 배열된다. 내 지인들이 관심있어 하는 뉴스와 읽을 만한 칼럼은 페이스북 뉴스피드에서 접할 수 있다. 속보나 특보는 유튜브, 시민들 반응은 트위터와 주요 온라인 커뮤니티의 댓글을 살피는 것으로 충분하다. 뉴스 생산량은 과거보다 폭발적으로 늘었고 뉴스 소비량도 늘었지만 TV와 신문이라는 매체의 소비는 현격하게 줄었다. 레거시 미디어가 마주하고 있는 위기의 핵심이다.
콘텐츠와 플랫폼
신문사와 방송사는 기사, 칼럼, 뉴스, 영상클립, 드라마 등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를 생산한다. 그렇다면 신문사와 방송사는 콘텐츠 기업인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진술이다. 신문사와 방송사는 한때 기술 기반 플랫폼 회사였다. 고가의 윤전기로 종이신문을 대량으로 찍어낸 뒤 배포망을 통해 하루 단위로 전국에 신문을 배포하는 능력이 신문사의 플랫폼으로서의 역량이었다.
마찬가지로 전파망과 송신기술이 방송사 플랫폼의 근간이었다. 신문과 방송의 플랫폼으로서의 지위는 강력한 해자(垓子)의 보호를 받았다. 고가이면서 (당시로서는)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윤전기의 보유와 운용, 그리고 전파 공공성에 따른 전파 사용 면허가 그것이다. 신문과 방송이 과거에 누렸던 지위는 사실 콘텐츠 경쟁력에서 오롯이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정보의 유통망을 장악한 일종의 플랫폼이었다는 점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강력한 유통망을 가진 사업자는 항상 시장을 지배했다.
인터넷이 도래하기 이전에도 그랬다. 아시아와의 독점 무역권한을 가진 17세기 동인도회사, 철도를 깔아 부를 축적한 카네기 철강회사, 미국 전역에 유통망을 가지고 있는 월마트 등을 떠올려보라. 역사적으로 거대기업으로 성장한 회사들은 모두 플랫폼이었거나 플랫폼으로서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플랫폼, 그리고 레거시 미디어의 활로
유통망은 새로운 기술에 의해 대체된다. 현재 레거시 미디어가 겪고 있는 위기는 기존에 유지되던 플랫폼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IoT기술에 기반한 새로운 플랫폼이 기존 신문과 방송의 플랫폼을 잠식하고 있다. 신문이 방송에 밀렸던 것처럼 이제는 방송이 IoT 기반 기술 플랫폼에 밀려 시청자 도달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다. 전세를 역전할 방법은 당장 보이지 않는다. 유통망 경쟁에서 밀리는 레거시 미디어가 당장 취할 수 있는 전략은 결국 제품의 질, 즉 콘텐츠 경쟁력에 집중하는 것이다. 신문사와 방송사의 주력 제품 즉 기사와 뉴스가 어느 순간 콘텐츠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된 배경이다.
“플랫폼에 맞추는 게 아니라 콘텐츠를 플랫폼화 하겠다”는 성지환 72초TV 대표의 선언은 이런 맥락에서 의미심장하다. 콘텐츠의 플랫폼화란 콘텐츠 내러티브나 미장센에 다른 상품이나 정보를 얹어 유통시키겠다는 의미다. 막강한 기술 기반 플랫폼이 자리를 잡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플랫폼을 만들어 경쟁하겠다는 목표는 현실적으로 달성 가능성이 낮기에 콘텐츠 기반 회사가 취할 수 있는(취할 수 밖에 없는) 전략이다. 이미 역사적으로도 검증된 모델이다. 드라마 PPL을 생각해보라.
문제는 기술 기반 플랫폼의 시장 지배력이 워낙 공고해져 고품질 콘텐츠와 언론사의 신뢰 회복으로 해결될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는 점이다. 제품이 아무리 좋아도 판로가 없으면 사장되는 법이다. 결국은 신문과 방송이란 플랫폼을 넘어 기술 기반 플랫폼 활용을 극대화할 수 밖에 없다. 이제 그저 좋은 콘텐츠로는 안된다. 플랫폼에 최적화된 콘텐츠가 필요해졌다. 그리고 그러한 콘텐츠로 다른 플랫폼의 등 위에 올라 탈수 밖에 없다.
레거시 미디어의 뉴미디어 생존 전략
▲SBS는 서브브랜드인 <스브스뉴스>, <비디오머그> 등을 런칭했다.
레거시 언론사들은 몇 년 전부터 모바일 퍼스트를 외치며 이런 상황에 대응해왔다. SBS는 지난 2015년 SBS뉴스의 서브브랜드인 <스브스뉴스>와 <비디오머그>를 런칭했다. <스브스뉴스>는 여러 장의 이미지 슬라이드를 나열해 스토리텔링을 하는 <카드뉴스> 포맷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비디오머그>는 기존 뉴스 촬영 영상 가운데 뉴스화되지 않은 자투리 영상을 CG 및 효과음으로 재가공하는 이른바 ‘자투리 저널리즘’으로 최근 존재감을 넓혀가고 있다. 자체 사이트뿐 아니라 페이스북과 유튜브 등 외부 플랫폼도 적극 활용해 구독자를 늘려가는 중이다. 일종의 버티컬 브랜드 전략인데 아직까지는 순항하고 있는 중이다. 이에 발 맞춰 보도본부의 한 부서였던 뉴미디어부가 뉴미디어실을 거쳐 뉴미디어국으로까지 승격되는 등 기성 언론사 중에서는 비교적 빠르게 뉴미디어환경에 대응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JTBC는 강력한 손석희 브랜드와 소셜 친화적 전략으로 페이스북과 유튜브를 중심으로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JTBC는 JTBC뉴스와 JTBC 소셜스토리라는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메인뉴스인 뉴스룸의 브랜드 확산을 극대화하고 있다. 뉴스 계정으로 일반적 형식의 뉴스를 피드하고 뉴스 제작 뒷얘기 등을 소셜스토리에 노출시켜 시너지를 내는 방식이다. 아직 스핀오프 서브 브랜드를 본격적으로 키우고 있지는 않다. 최근 자사 탐사보도물을 클립화한 트리거 계정을 시작하며 서브 브랜드 뉴스 실험을 시작했다.
▲유투브, 페이스북 등 뉴미디어를 거점으로 운영되고 있는 언론사의 서브 채널들
MBC와 KBS는 각각 엠빅뉴스와 크랩이란 뉴스 서브 브랜드를 런칭해 운영해오고 있다. 기존 뉴스 재가공 콘텐츠와 함께 카드뉴스, 오리지널 영상 콘텐츠 등도 선보이는 중이다. SBS와 유사한 모델을 따르고 있다. 이 밖에도 CBS의 씨리얼, 한국일보의 프란, 헤럴드경제의 인스파이어 등이 주목할 만한 레거시 미디어의 스핀오프 서브 브랜드인데 아직까지는 실험과 모색 단계라고 볼 수 있다.
디지털이라는 무한 경쟁의 세계
디지털의 세계는 진입장벽이 매우 낮다. 레거시 미디어가 뉴미디어 세계에 발을 들이는 순간 무한 경쟁의 리바이어던과 마주하게 된다. 기존 지상파와 종편 뿐 아니라 1인 MCN, 제법 몸집을 키운 뉴미디어 전문 제작사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경쟁자이다. 72초TV, 국범근의 쥐픽쳐스, 연플리, 브랜디드 콘텐츠를 직접 만들기 시작한 대기업 등과 콘텐츠 소비자의 시간을 뺏는 싸움을 벌여야 한다. 계급장 떼고 콘텐츠 제작능력 만으로 일합을 겨뤄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수익 기반을 확보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뉴미디어 업계에서는 다양한 수익 모델이 실험되고 있는 단계이지만 기존 방송 광고처럼 확실한 시장이 형성돼 있지 않다. 현재 뉴미디어 콘텐츠 제작사들의 수익 모델은 플랫폼 광고수익 쉐어, 브랜디드 콘텐츠 제작, 콘텐츠 직접판매 등이지만 확실한 수익모델로 자리매김한 것은 없다. 해외에서는 NYT의 구독자 모델이 뚜렷한 성과를 내고 있다. 하지만 온라인 구독 수익이 감소하는 기존 광고 수익을 완벽하게 대체하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 게다가, 한국은 돈을 내고 콘텐츠를 구매하는 문화가 자리잡지 못했다는 한계도 가지고 있다. 일부 뉴미디어 콘텐츠 제작사들은 머천다이즈와 커머스에까지 손을 뻗치며 다양한 수익 모델을 실험중이다.
위기이자 기회, 레거시 미디어의 미래는
여기에 거대 기술 플랫폼 회사들이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을 속속 선언하면서 더더욱 힘겨운 싸움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넷플릭스가 이미 자체 제작 오리지널 콘텐츠를 성공적으로 안착시켰고, 애플도 거액을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에 투자하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반대로 콘텐츠 업계의 제왕인 디즈니는 폭스를 인수해 콘텐츠 제국을 형성한 뒤, 넷플릭스에서 탈퇴해 독자 플랫폼화의 길을 걷겠다고 밝혔다. 거대 플랫폼, 콘텐츠 기업들이 서로의 장점을 흡수해가며 플랫폼-콘텐츠의 수직 계열화를 꿈꾸고 있다. 국내에서도 네이버가 연플리 등으로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에 돛을 올렸고, SKT등 통신 대기업도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에 동참할 태세다. 콘텐츠 업계가 거대 자본과 IoT 기술의 대격전장이 되어가고 있다. 이 틈바구니에서 레거시 미디어는 생존을 위한 여정에 이제 막 발을 내딛고 있다. 쿼바디스, 레거시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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